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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출처 : 인터넷검색

 

얼마전에 있었던 잊을수 없는 상황이 있어서 그에대하여 글한번 남겨보려고 합니다. 일단은 저는 사업을 하고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정말로 경기가 않좋아서 저의 상황이 않좋아지고 있습니다. 제가 사업을 하면서 본업에만 신경써서 성공하려고 노력을 하였지만 돌아가는 세상이 본업에만 치중하면 잘못하다 큰일날수가 있다고 생각이 들어서 이곳 블로그를 만들어서 부업도 본업과 병행을 하면서 사업을 합니다. 솔직히 이렇게 초인적인 능력을 보이면서 사업을 하는데도 어렵습니다. 그만큼 요즘에 돌아가는 세상은 미쳐서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그것에 대한것은 각설하고, 앞에서 사업을 하고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저의 거래처들이 돈이 돌지가 않아서 힘들어 집니다. 그리고 저의 물건을 사줘야하는 싯점이 도래하여도 물건구매를 조금씩 미루기 시작합니다. 저의 물건이 있으면 1분이면 작업할것을 그물건 없이 두시간동안 작업을 하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현재의 우리나라 경제상황이 이정도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인하여 저도 너무나도 힘들어 집니다.

 

저는 이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방법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딱히 선택할 방법이 많지가 않습니다. 아니 한가지 떠오르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식이 부모에게 부탁을 드리는 방법이 현재의 상황을 극복할 가장좋은 방법이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저도 저의 아버지에게 한번도 밀려본적 없이 용돈을 드렸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용돈을 드릴것이니 이방법을 선택하면 저의 아버지도 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실것 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사용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지만 세상이 저를 좋지못한 방법을 사용하도록 등떠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법을 사용하기로 결심합니다.

 

저는 저의 아버지에게 부탁을 드리려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안받으십니다. 저의 아버지도 제가 아버지에게 어떠한 부탁을 드리기 위하여 전화를 한다는것 아셨던 것입니다. 이유는 저의 블로그에 올라오는 글들을 저의 지인분들이 계속해서 모니터 하시고, 제가 글로써 부탁을 드렸던, 아버지에게 저의 홈페이지를 보여달라는 부탁과 저를 도와달라고 전화한통씩 해주시면 감사드린다는 글을 보시고 저의 주변 지인분들이 저의 부탁을 들어주신것 알아버리게 됩니다.

 

다시금 고민이 깊어집니다. 이유는 저의 아버지가 휴대전화를 안받으신다는것은 저의 부탁을 들어주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네집에 전화를 해볼까 생각을 하였지만 그것은 저의 형이나, 형수 그리고 저의 동생내외가 어려워져도 도와줄 생각이 없다는 것으로써, 그로인하여 저의 아버지는 지금처럼 대우받으시는것에 어느정도 타격을 입으실것으로 판단이 되었습니다. 이유는 부모가 자식이 힘들어질때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다면 자식들은 부모님의 공양의 의무만 생기고, 힘들때는 나몰라라 할것이라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면 지금보다는 저의 아버지 모시기를 조금은 꺼려할것 이라고 판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주변에 지인들의 이해관계를 활용하여 제가 처해있는 어려움을 극복해 보기로 합니다. 그래서 저의 아버지의 여동생인 저의 고모님께 전화를 드려서 위와같아서 집에다가 전화를 드리기는 힘들것 같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저의 고모님이 저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셔서 저의 전화를 받도록 해주시거나 아니면 저를 도와주시도록 한말씀 더 거들어 주시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고맙게도 저의 고모님은 그렇게 해주신다고 하십니다.

 

저는 저의 형수님이나 저의형을 믿고서 저의 고모님께 부탁을 드린것입니다. 분명히 저의 고모님은 저의 아버지에게 전화하여 이상황에서 자신이 어느정도 관여하여 고모님도 조금의 이익을 얻으시려고 하신다는것 잘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저의 형이나 형수님이 관여하지 못하도록 할것으로 판단되어 결국은 저의 문제는 풀려갈것으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날 모든문제가 해결되었고, 저는 저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저의 살아생전에 저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을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도움을 받고야 말았습니다.

 

그렇게 모든상황이 하루만에 끝이 나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아버지에게 고맙다고 전화를드리는데 저도 나름에 많이 힘들기는 하였는가 봅니다. 전화통화 하는데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마무리를 하고서 잠을 청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어차피 아버지가 저를 도와주기로 하셨으니 이참에 안전한 수준까지 도움을 요청드리는것이 좋을것 같아서 저의 형수님께 제가 필요로하는 금액을 다시금 문자로 드렸고, 저는 제가 원하는 정도의 안전자금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입장에서도 어차피 도와주기로 한거면 자식이 원하는 수준을 맞춰주기를 바라실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아버지에게 커다란 도움을 받고서 너무나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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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출처 : 인터넷검색

 

제가 이곳 블로그에 글쓰기를 시작하는 첫글입니다. 이건또 무슨 말도안되는 이야기냐고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계실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현재 저의 블로그에 백개가 넘는 글들이, 아니 이글이 발행되었을때는 200 ~ 400개 사이의 글들이 올라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실은 이곳 블로그로 이사를 오고나서 처음 글을 올리는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이곳 글쓰는곳이 조금은 낮설기도 하지만, 저의 본업에 관련된 글을 올리는곳도 이곳 티스토리라 그나마 많이 낮설지는 않습니다.

 

무슨이야기인지 어리둥절해 하실분들이 계실것 같아서 하나씩 풀어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네이버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10개월 정도를 운영하였고, 네이버 블로그에 초기에 많은글들을 작성하고 그후에 하루에 하나씩의 글들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400개가 넘는 글들을 작성하였습니다. 그렇게 정성을 들였다는 말입니다.

 

저의 글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전부다 저의 머리에서 나온글들 입니다. 그래서 이글들에대한 저작권은 저에게 있습니다. 그렇게 네이버 블로그를 정성스럽게 키웠는데 방문자는 200명정도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격적으로 이곳 티스토리로 옮기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네이버 블로그에 작성된 저의글들을 백업받는데, 네이버 블로그는 백업도 어렵게 되어있습니다. 그냥 pdf화일로 다운받도록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글쓴것 내놓고 나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글들이 어느정도 수준인지 잘알기 때문에 그것을 용납할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pdf화일로 다운받아서 이곳에 하나씩 이곳 블로그에 글올리기를 하고있습니다. 앞서서 저의 글들에대한 수준을 저는 너무나도 잘알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의글은 어디에 내놔도 뒤쳐지지 않는 글들입니다. 그런데 네이버 블로그 막판쯤에는 저의 블로그를 사겠다는 쪽지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저의 블로그의 가격이 어느정도 되는지 궁금하여 얼마에 구매할것인지 물어본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담당자가 25만원을 불렀습니다.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가격이었습니다. 그냥 날로먹겠다는 심보입니다.

 

제생각에는 네이버가 국내에 독보적인 검색사이트라 독과점을 행사하는것 아닌지 의심스러웠습니다. 저의 글수준을 잘알고있는데 그러한 블로그는 검색유입이 잘되지 못하도록 하여서 하루에 200명정도만 들어오도록 하고서 그것을 다른 광고사이트를 운영하는 회사에 판매하도록 유도하는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전격적으로 이곳 티스토리로 옮기기로 결정한것 입니다. 저의글은 분명히 하루에 200명 정도가 들어오는 글들이 아닌데 그정도로 만들어준 네이버에게 화가나기도 하였습니다.

 

어쨌든, 이곳 티스토리로 옮기면서 네이버, 다음, 네이트에 검색등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이곳 티스토리는 다음이 소유하고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몇개의글을 올리고나니 다음은 반나절도 되지않아서 검색등록을 하여주었습니다. 분명히 검색등록은 일주일정도 걸립니다. 그리고 길면 10일이내에 등록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네이버와 네이트는 언제쯤 검색등록을 해줄까요? 아마도 10일이 다되갈때쯤 검색등록을 해줄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렇다면 네이버가 10일이 다되갈때쯤 검색등록을 해준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분명 다음은 저의글을 보고서 담당자가 반나절도 안되어서 검색등록을 해주었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저의글이 상당히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는것입니다. 그리고 이글이 발행되었을때는 네이버도 눈물을 흘리면서 검색등록을 해주었을 것입니다.

 

저정도의 글을 뽑아내는 블로거는 대표적인 포탈사이트에서도 놓치기 아까워하는것 잘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음은 반나절도 안되어서 검색등록을 해주었다는것이 그증거 입니다. 이정도 글을 뽑아내는 사람은 다른 일반 블로거 1,000명과도 안바꿀것 이라는것도 잘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에게 조금의 기대를 하는것이 저의글을 다음에 메인화면에 언젠가는 뿌려줄것을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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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출처 : 인터넷검색

 

저를 이세상에 태어나도록 해주신 저의 어머님에대한 기억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저의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릅니다. 지금나이가 40대초반이지만 저는 아직도 저의 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러서 좀더 가까운 느낌을 갖고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글에 이후부터는 어머니가 아니라 엄마라는 호칭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엄마는 현재 세상에 안계시는 분입니다. 제가 대학교 2학년때 세상을 버리셨습니다. 병은 유방암으로 세상을 버리셨는데, 그래서 저는 저의 엄마만 생각하면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수가 없습니다. 살아생전에 고생만 하시고 자식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벌어서 용돈을 받으실 나이가 가까워 지면서 세상을 버리셨으니 자식으로써 안타까움은 이루다 말할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엄마만 생각하면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제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한번이라도 저의 엄마에게 용돈을 드렸다면 이러한 안타까움과 눈물에 대해서는 조금은 벗어날수 있었을 것인데, 저의 엄마는 뭐가 그리 급하셨는지 제가 사회생활을 하기전에 그렇게 세상을 버리신것 입니다.


제가 저의 엄마를 생각하면 자꾸만 눈물이나는 이유중에 한가지가 더있습니다. 그것은 저의 엄마가 세상을 버리실것을 알고계신 저의 이모님들이 저의 엄마와 세상에서의 마지막 여행을 같이금 다녀오신것 입니다. 그렇게 여행을 다녀오신 저의 엄마는 너무나도 기분이 좋아지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여행을 다녀오신 저의 엄마에게 저는 저의 엄마에 가슴에 대못을 박는 못된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에대하여 반성하고 사과해야 되는데 사과를 받으실 저의 엄마는 세상에 안계셔서 사과를 할수가 없습니다.


저의 엄마가 살아계실때는 몰랐던 많은것들이 세상을 버리시고나니 자꾸만 떠오르는것도 사실입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살아계실때는 싫었던것들이 세상을 버리시고나니 아쉽고 그리워 지는것 같습니다. 그러한것도 사람인지라 그런것 같습니다.


저의 엄마에 대하여 이것저것 구체적으로 적어보고 싶지만 그러한것들을 구체적으로 적다보면 눈물이 멈추지않을것 같아서 구체적으로 적지못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제가 저의 엄마에 가슴에 대못을 박은 못된말에 대해서 글을 적기 시작하였는데 적으려고하니 자꾸만 눈물이 나와서 그에대해서 적지도 못했습니다. 이것이 천륜인것 같습니다.


어쨌든 제가 저의 엄마에게 잘못한것 사과도 안받으시고 세상을 저버리신것도 너무나도 가슴에 한이됩니다. 입으로는 이해하실것이라고 말은 하지만 마음속에서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그또한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글이라도 써놓으면 마음이 편할까 싶어서 글이라도 써보는데, 솔직히 글쓰면서 자꾸만 저의 엄마에게 했었던 못된말만 떠올라서 가슴이 아프고 답답합니다. 죄송하다고 글이라도 써놓으면 속편할것 같아서 글을 써보지만 하나도 속편하지 않고 자꾸만 죄송한 생각만 듭니다. 그래서 오늘글은 여기까지만 작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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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출처 : 한겨레21

 

제가 자취생활을 하였던 기간은 약 15년정도 되는것 같습니다. 자취생활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것 같은데 정말로 시간이 빨리흘러 가는것 같습니다. 일단 제가 자취생활을 시작하게된 이유부터 시작하는것이 올바를것 같습니다. 제가 자취생활을 시작한 이유는 젊은시절 저희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저희집이 지방으로 이사를 가야하는 상황이 발생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때의 저의나이는 26살로 군대를 갔다오고 대학교 2학년때 입니다. 그해 12월에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저는 학교를 다녀야 하는상황이라 그때부터 저의자취생활의 시작이 됩니다.


자취방은 성남에있는 방한칸짜리 옥탑방에서 시작을 합니다. 그곳은 제가다니는 학교에 걸어서 10분이면 도착하는 학교와는 아주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옥탑방에 살아보신분은 아시겠지만 옥탑방은 여름에는 엄청덥고, 겨울에는 엄청춥습니다. 그렇게 저의자취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취생활의 시작은 제나이 27세때 부터입니다. 사실 저의 속마음은 좋기는 하였습니다. 부모님의 간섭을 받는것이 최소화 되고 제가하고싶은것 마음데로 할수가 있어서 였습니다. 지금은요? 자취생활 안좋습니다. 이것이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제가 자취생활을 하면서 정했던 철칙중에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저희과 친구들을 저희집에 데려오지 않는다는 철칙입니다. 특히나 술마셔서 집에못가는 친구들은 절대로 저희집에 발도못붙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간날때마다 친구들에게 저의철칙을 이야기 하여주었고, 친구들도 저의 생각을 어느정도 이해하였는지 그철칙을 잘지켜 주었습니다. 그렇게 저의자취생활이 저의몸에 베어버립니다. 그리고 당시에 저의형이 성남에있는 공군비행장에서 근무를 하여서 가끔씩 저희집에 놀러와서 술한잔씩 마시기도 하고 저의 자취방에서 잠을자고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그당시의 저의형이 좋았습니다. 당시의 저의형은 저의이야기를 많이 들어주는 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해서 그부분은 아쉽습니다.


제가 자취생활을 할때에 가장힘든때는 당시에 저의 학년이 대학교 3학년입니다. 3학년은 그과에 주옥과같은 과목들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공대에 대학3학년은 정말로 생각하기 싫을정도의 시간입니다. 주옥과같은 과목들에 시험은 기본적으로 학기당 3~4번씩 보는데 저는 주옥같은 과목을 7과목을 듣습니다. 그러면 최소한 3번만 본다고 하여도 한학기에 21번의 시험을 치릅니다. 한학기가 16주정도 되니까 매주시험을 치룬다고 보시면 맞습니다. 시험시간도 짦은것은 2시간, 길게시험보는 과목은 4~8시간동안 시험을 봅니다. 그래서 이렇게 지치도록 시험을 보는날은 시험이 끝나면 거의가 술자리가 있습니다. 공부한다고 지친몸을 건사하는데 술만큼 좋은것이 없어서 그런것 같습니다.


그날도 6시간정도 시험을 치루고 술자리가 있었습니다. 술을 마시면서 오늘시험에 대하여 품평회가 열립니다. 시험을 망친친구는 술을 거퍼마시기도 합니다. 그렇게 술자리가 끝나면 지친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합니다. 이유는 대부분 전날에 밤샘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도 밤샘을 하고서 술자리에서 술한잔 마시고 집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걸어서 10분정도의 거리가 어찌나 멀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겹게 집근방에 다다르고 있는데 멀리서보니 공사를 하는지 땅을파놓은곳이 있는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그곳을 조심하여서 가야한다고 생각을 하고서 조심조심 집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런데 술을마시고 전날에 밤샘을 하여서 그런지 제몸이 자꾸만 구덩이 쪽으로 가는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구덩이에 빠졌습니다. 분명히 맨정신 이었으면 크게다쳤을 것입니다.


구덩이의 높이는 저의키보다 조금높은듯 보였습니다. 한 2m정도의 높이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작은사다리가 있었습니다. 분명 이곳에서 공사하신분이 들어갔다가 나오기 위하여 넣어놓은 사다리 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사다리를 이용하여 빠져나오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날에 밤샘을 하였고 술도거하게 마신상태라 빠져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결국은 너무나 피곤하여 구덩이속에서 밤을보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어느정도 술이깨고서야 구덩이를 빠져나올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구덩이에서 빠져나와 집에가서 부족한잠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어나보니 몸이 너무나 아픈것 입니다. 구덩이에서 잠을잔것이 잘못된것 입니다. 결국 몸살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시름시름 앓고있는데 저를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실감하며 자취생이 아프면 서럽다는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리고 밥을 먹어서 기운을 차려야 하는데 밥먹을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힘든몸을 이끌고 냉장고문을열어보니 냉장고에 오렌지한개가 덩그러니 있는것 이었습니다. 그것을 칼로잘라 빨아먹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말입니다.


전국에계신 자취생여러분 힘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프면 서럽습니다. 아픈데 도와줄 사람이 없기때문입니다. 저도 그이후부터는 아프지 않을려고 무지노력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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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출처 : 한국일보

 

제가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던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이 저의 사회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곳이어서 한번 그때를 생각하면서 저의 생각을 정리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할때는 1999년도 였습니다. 당시는 한참 IMF로 서민들이 고통을 받았던 시절입니다. 저도물론 취업이 안되어서 고생을 하고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힘든시기를 넘길까도 진지하게 고민하던때 였습니다. 사실 대학원에 가게되면 교수님들이 등록금을 대주시고 일정부분의 용돈형식으로 생활이 되는정도의 생활비도 지원을 하여주십니다. 그래서 어차피 IMF때문에 취업하기도 힘든데 대학원에 지원하고 싶은생각이 솔직히 더욱 많았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자주가보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날 저희과 게시판에 구인광고가 떴습니다. 그날은 제가 일찍 학교에 와있어서 저밖에 구인광고를 본사람은 없었습니다. 당시는 취업하기가 너무힘들어서 이런기회를 놓치면 안된다는 생각에 미리작성하여 놓았던 이력서를 구인광고를낸 회사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면접을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면접을 보러갔습니다. 그런데 사무실에는 경리한분과 사장님 딱두사람만이 있는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면접은 아주간단히 치루었고 그날로 합격통보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사장님이 한말씀 하십니다. 일주일정도 이곳에 있다가 당신은 과천으로 6개월정도 출퇴근 할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회사에 출근을 하였습니다. 출근날 저와사장님은 과천에 갔습니다.


도착한곳은 과천에있는 기술표준원이라는 국가연구기관 입니다. 그곳에간 이유는 기술표준원에서 연구개발한 어떠한 기술을 사장님이 사업화를 시키기 위하여 저를 파견보내는 형식이었습니다. 저는 싫튼좋튼간에 6개월은 과천으로 출퇴근을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곳에 박사님에게 인사를 시키러 저를데리고 간것입니다. 제가있어야할 연구실은 무기신소재연구소입니다. 그리고 저를 맡으신 박사님은 남자분이신데 인상이 아주좋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방에 여자박사님도 한분계셨습니다. 또한 박사님을 도와서 연구를 해주는 연구원이 3분이 있었는데 3분이 전부다 여자분이셨습니다. 연배는 당시의 저의연배와 비슷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희 신소재연구소에 총인원은 6명이됩니다. 남자박사님 1분, 여자박사님 1분, 저, 여자연구원 3분 이렇게 말입니다. 거기다가 옆방에 작은연구실이 하나있는데 거기도 여자박사님 1분과 여자박사님을 도와주시는 여자연구원 1분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방과 옆방에 연구소와는 아주각별히 잘지내는것 같았습니다.


일단은 전반적인 연구소 분위기는 좋았습니다. 거기다가 진짜로 완전히 여성분들에게 둘러싸여서 연구소에 일하러갈맛이 났습니다. 정말로 불평불만없이 연구소에서 일했습니다. 제가 기술을 습득하여야 하는것은 "알루미나"라는 세라믹소재를 미세화시켜서 만들어 내는것 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알루미나로 실리콘 같은것을 갈아내는데 사용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곳 기술표준원(이하 기표원)에 분석장비는 정말로 전국에서 최고가의 분석장비들이 속된말로 널부러져 있습니다. 학교 연구소나 기업의 연구소에서는 구경하기힘든 분석장비들이 자신을 이용하여 분석해줄 연구원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을 조작할 연구원들이 부족하여 놀고있는 분석장비들이 즐비합니다. 그런조건에서 일한다는것은 정말로 행복한 일입니다. 학교에서는 별것도아닌 분석장비 하나가지고 줄서서 분석하여야 하는데 이곳 기표원에는 고가의장비를 가지고 하루종일 분석하고 있어도 누가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열심히 연구한다고 칭찬받습니다. 그래서 기표원으로 출퇴근하는 6개월은 정말로 행복했습니다. 특히나 제가 다뤄야하는 분석장비는 X-RD라는 장비입니다. 요즘은 많이 보급되어 있는것으로 알고있지만 당시에는 구경하기도 쉽지않은 장비입니다. 저는 그장비를 원없이 다뤄봤습니다.


하루는 그날에 실험을 위하여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는데 대학동창의 전화가 왔습니다. 그친구도 어느연구소에 있는친구입니다. 그런데 그친구는 저와는 별로 안친했는데 어떡게 저의연락처를 알아서 전화를 한것입니다. 그리고는 혹시 X-RD라는 장비로 2~3가지정도만 분석할수 있냐는 전화였습니다. 시편은 자신이 만들어서 기표원안에 들어와있다는 것입니다. 헐~~ 막무가내였습니다. 사실 시편 2~3가지정도면 20분안에 끝나는 일이기는 합니다. 그래서 박사님에게 물어보고 말해주겠다고 하고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친구 간단히 분석을 마치고 복귀하였습니다.


어쨌든 저의 첫사회생활을 하였던곳이 기표원이어서 솔직히 좋았습니다. 원없이 많은 분석장비를 다룰수가 있어서 말입니다. 물론 월급은 모기눈물만큼 받았지만 그보다도 배울수 있는것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기표원이 KS표준을 만드는 곳이다보니 표준에 대해서도 많이알수가 있었습니다. 사실 일하다보면 자신의일만 하지는 않습니다. 가끔은 급하면 제가 늦게까지 남아서 박사님업무를 도와드리기도 하여서 표준에관련하여 돌아가는 업무흐름을 파악할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거의다 까먹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기표원에서 일한것이 인정받게 되어서 제대로된 회사를 들어가는데 도움을 받기도 하였고 말입니다. 그곳이 진짜로 제가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하게된 외국계회사인 반도체용 접착제를 생산하는 회사에 입사하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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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출처 : 인터넷검색 및 본인의 약간의편집

 

오늘은 자신을 귀하게 여겨주는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주제로 글을 올려봅니다. 물론 저의경험을 바탕으로 하여서 글을 올리는 것입니다. 솔직히 지난주말에 저는 상대방에게 아주큰 귀한대접을 받아서 그감동을 저의 블로그에 오시는 분들과 나누고져하는 생각에서 글을 올리는 것입니다.


저는 현재 40대초반의 노총각입니다. 자랑은 아니지만요. 그래서 사촌누나의 소개로 한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지난주 토요일에 서울의 풍물시장에 놀러가자고 제안을 하였고, 토요일에 풍물시장을 갔습니다. 솔직히 사촌누나의 소개로 만났던분도 40대초반의 여성분이라서 솔직히 썩 내키지는 않았었습니다. 사실 만나서 결혼하고 저의 아이도 갖고싶은데 아이를 낳기에는 나이가 많은것이 걸렸었습니다.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사람이니까 생각할수 있는것 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풍물시장에 가기위해 오후 12시에 약속을 잡았고, 상대분이 12시 30분으로 30분을 늦춰서 다시 약속을 잡았습니다. 저는 상대방을 배려한다는 생각으로 11시 30분에 도착하여 풍물시장에 어디어디를 돌아다닐지 미리미리 점검을 하였습니다. 오자마자 어디를갈지 헤매지 않기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약속장소에 12시 30분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약속시간을 훌쩍 넘어서 1시 30분이 거의다되어서 도착을 하신것 입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아침식사는 하셨는지요? 그분은 아침식사도 안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결심하였습니다. 뭐를요? 그분과 만남을 유지하기로 결심을 한것입니다. 이글을 읽으시는 분중에는 약속시간을 1시간이나 늦게온 사람에게 만남을 유지하기로 한다는게 이해를 못하실 분들이 계실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이 그날에 어떠한 일들을 겪으셨는지 단방에 알수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아침일찍 일어나서 저와의 만남을 준비하였을 것입니다. 그것도 저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이옷입고갈까? 저옷입고갈까?"하면서 집에있는 옷장에 옷들은 바닥에 패대기 쳐져있을것이고, 화장도 수시로 고쳤을 것입니다. 그것도 저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준비하는데만도 엄청나게 오랬동안 걸렸고, 약속시간도 다가오는데 초조하셨을 것입니다.


그것도 저를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얼마나 고마운 행동입니까? 저만을 위하여 아주열심히 준비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분에게 늦었다고 뭐라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것입니다. 저를 생각하면서 저만을 위하여 열심히 준비하셨는데 말입니다. 즉, 저를 그정도로 귀하게 생각해 줬다는 말인데 그런분에게 화를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분을 기다리는 1시간동안 기뻐서 눈물이 날정도 였습니다. 나만을 위하여 준비하는 시간이 모자라서 약속시간을 거의 1시간정도 어길정도로 저를위해 준비하였다니, 기쁘지 않겠습니까?


기다리는 중간에 늦어서 미안하다는 문자를 받았을때 저는 "많이늦어도 상관없으니 뛰지말고 다치지않게 천천히 오세요"라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만을 위하여 그렇게 준비했는데 급하게 뛰어오다가 다치면 나만을 위하여 준비한것을 제대로 볼정신도 없을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그분이 다치지 않고 뛰지말고 천천히 오시기를 희망하였던 것입니다. 저를 그렇게 귀한대접을 하여준 분에게 제가할수있는것은 천천히 오시기를 바라는것 뿐이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그분을 저에게 최고의 여자로 맞이할 것입니다. 저를 귀하게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아침도 굶어가면서 저를위하여 준비하신 정성을 어떡게 말로다 표한할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앞으로 그분을 제가할수있는 최고로 사랑할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더많이 사랑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그여자분이 행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을 앞으로 그분이 저를생각하는것 보다더 사랑할 작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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